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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종직의 초상화에 얽힌 이야기

인천 갈매기 2026. 5. 19. 19:30

■ 구종직의 초상화에 얽힌 이야기


구종직은 조선 초기 경학과 주역에 뛰어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유종(儒宗)의 사종(師宗)”이라 불릴 만큼 많은 학자들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세조 때 크게 중용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고, 마침내 정1품 숭정대부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야사에는 구종직의 풍모를 두고 “기이하면서도 위대하고, 호탕한 인물”이라 전하고 있다.

특히 예종이 세자 시절이었을 때, 부왕인 세조가 화공으로 하여금 구종직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하사하였는데, 예종은 그 초상을 벽에 걸어두고 늘 찬탄하였다고 한다.

당시 초상화를 칭송하며 남긴 찬상시(讚像詩)는 다음과 같다.

容貌似程頤
髮髥鬱如林
幸遇聖明際圖形
子孫欽

용모 사 정이
발염 울 여림
행우 성명 제도형
자손 흠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공의 용모는 중국 송나라의 대학자 정이(程頤)를 닮았고, 수염은 울창한 숲과 같아 풍채가 뛰어났도다.

성군을 만나 그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졌으니, 자손들은 이를 길이 보존하며 그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세조가 하사한 어제(御製) 찬상시와 초상화는 오랫동안 후손 들에게 전해졌으나, 후손들이 세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끝내 분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충청남도 서천에 세거하던 평해 구씨 대종친회를 중심으로 구종직의 사우(祠宇)를 세우려는 뜻이 모아졌고, 조선 말기인 1910년 경현제를 건립 하였다.

이어 1917년에는 본 사우인 청덕사를 완공하여 구종직의 학덕과 공적을 기리게 되었다.

청덕사에는 본래 구종직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려야 했으나, 진본 영정이 남아 있지 않아 약 60여 년 동안 영정 없이 제사를 모셔왔다. 이후 1980년대 초, 평해구씨 대종친회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영정 제작이 추진되었다.

당시 국전에 입선한 동양화가 진환(振煥) 종친(23세 장선파)이 구종직의 용모에 대한 예종의 찬상시와 야사,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인 “키가 칠 척에 이르고 얼굴이 기위하며 수염이 두 척이 넘었다”는 내용 등을 면밀히 고증하여 영정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새로 제작된 영정은 청덕사에 봉안되었으며, 이후 시흥 무지동에 세워진 안장사 영전각에도 함께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