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부터 학문으로 발달한 유학이 조선조에 와서는 국가의 숭유 억불정책에 따라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나라의 인재를발굴하여 쓰는 과거시험에서도 사서 삼경을 시험 과목으로 하였으니 유학의 소양이 있는 많은 인재가 벼슬 길에 들어 왔다.
아무리 그의 부친이 높은 고관대작의 지위에 있을지라도 과거에 등과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면 무시 당하였다.
사대부 양반집안일지라도 자제가 과거에 급제해야 당당히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었던 사회였다.
구종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선대는 고려말에 민부전서(호조판서)를 지내고 그의 조부도 고려말에 정삼품 벼슬인 통헌대부 사재시사를 지냈 다 조선개국후 구종직의 부친 구양선은 비록 미관 말직인 정구품직인 풍저창부사의 자리에 있었지만 자손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구종직은 어려서 다섯살때 부터 교육을 받았다.
머리가 영리하여 그의 부친 양선은" 이아이가 우리집안을 크게 빛낼 거야" 하면서 자손교육에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다.
구종직은 점점 자라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사서 삼경 등 유학에 심취하였다.
당시 교육기관이었던 향교나 성균관이 아닌 서당에서 유명한 스승을 모시고 사서 삼경을 익혔으리라 구종직은 부친의 "이 아이가 앞으로 우리집안을 크게 빛낼 것이다" 이른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구종직은고대 중국의 역사와 예절이 담긴 사서 삼경인 경전을 암송하면서 앞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당시 재사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학자로서 펼칠 꿈을 그리면서 궁핍한 생활을 마다 않고 학문에 매진 하였다.
그러나 아조(조선조)에 와서는 개국공신의 집안도 아니요 선대가 혁혁한 벼슬을 한 집안도 아닌지라 시관의 눈에 뜨이지 않았는지 과거의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수차에 걸쳐 지회(遲徊)하였다.
그러다가 구종직은 남들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한창 빛을 발할나이인 삼십이세인 세종17년 ( 서기1435년 을묘년 )에야 초시에 합격한다.
이듬해 부친 양선공이 돌아가시니 3년간 상을 마치고 성균관에 들어가 젊은 유생들 틈에 끼여 경서를 열심히 읽고 암송하고 궁탐하였다 세종26년 (1444년) 갑자시에 합격한다 과거 급제가 늦었지만 과거를 급제하기 전에 사서 삼경 등 유학을 더욱 더 넓고 깊게 연구 궁탐하였으며 과거의 시험 과목이 아닌 주역에도 일가견을 갖을 수 있도록 깊이 연구 하였다.
심지어는 육도 삼략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 궁리하였고 불교와 도교와 당시의 민간 신앙까지도 주의 깊게 보았으리라고 본다.
구종직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세조조에 이르러 구종직이 세조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벼슬길에서 특진에 특진을 거듭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이때 구종직의 학문이 다 방면으로 출중함을 알고 세조 임금이 이를 높이 산 때문이라고 본다.
구종직은 고려말의 정세, 조선태조의 조선개국, 정도전의 신권정치에 대한 비판과 그의 죽음, 세자 책봉과 관련하여 왕자들의 골육상쟁, 2대 정종의 등극과 선위에 얽힌 이야기, 태종의 즉위와 왕권 강화를 위한 처가와 측근의 처단, 양녕의 세자 책봉과 세자 폐출, 충녕의 세자 책봉 , 세종의 등극과 성군 세종시대의 치세,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 세종의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를 우대하는 일련의 시대의 흐름을 보고 듣고 겪었으리라.
그러면서 앞으로 벼슬길에 나가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것인지 깊은 고뇌를 갖게 되었다.
구종직의 환로宦路ㅡ벼슬길 구종직은 세종26년 갑자시 (144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한직.(교서관정자)로 있다가 경회루에서 세종임금과 우연한 만남으로 춘추를 암송하여 세종이 구종직의 학문을 인정하여 만조 백관 앞에서 시험을 한 후 벼슬을 파격적으로 올려 준다는 이야기가 국초에 대동 야승에 전해 올 정도로 유명하여 야사에 전해온다.
그 후에 구종직은 세조 즉위 후에 세조의 인정을 받아 벼슬길이 활짝 열린다 세조는 구종직을 학자로서 최고의 예우를 하면서 경연에 참여하게 하여 학문적인 의문과 그 해답을 들었다 전해 오는 야사를 보면 구종직은 초야에 묻혀 있다가 늦은 나이(4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관 9품 정자로 출사하여 한직에 있다가 경회루에서 세종과 우연한 만남으로 학문적인 인정을 받아 벼슬길이 크게 오른다" 문종 단종조에서 한직에 있다가 계유정난이라는 대정변을 직접 보고격은 후 여러 자리를 거친 후 단종 3년에 사간원의 정5품 좌헌납에 어린 단종이 임금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상소한 기록이 보인다.
1456년 세조2년 1월에종4품 조봉 대부에 오르고 좌헌납정5품에 임명 되었다 다음해 8월에 원종 공신 3등에 책록된다.
그 후 구종직이 사간원 좌헌납으로 있을 때(세조2년) 의심스러운 옥사가 있었으나 구종직이 명쾌한 상소를 하는것을 보고 비록 세조자신의 뜻대로 처리하지만 구종직의 곧고의연한 상소에 1자급 올려 주었다.
그 후 낙안 군사로 나가서 낙안고을의 백성들을 잘 교화해서 낙안고을을 도에서 으뜸으로 만들었다.
그후 성균관 사성으로 내직에 있다가 연안 도호부사로 나가 백성을 사랑하고 문물을 풍부하게 하여 칭송이 도의 으뜸으로 하였다.
그 후에 세조는 "구종직이 경학에 밝고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종직이 잠시 향리에 쉬고 있을 때 성균관 직강과 종학박사를 제수하여 시강관과 종실의 종친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경연에서 역리 강론을 잘해 임금 세조의 인정을 받아 세조11년에 첨지 중추부사 겸 성균관 대사성 정3품으로 발탁하였다.
이후 편전에 나가 임금 앞으로 나가 역리를 강의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후 세조는 구종직에게 자급을 뛰어 넘어 정2품 판서의 위계를 주려고 하였으나, 공신인 영의정 신숙주와 이를 따르는 대사헌 양성지가 반대하여 종2품 가선대부 공조 참판에 임명 하였다.
이어서 종2품 가정대부로 하여 공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수 가정대부 공조판서) 그 해 가을에 구종직이 등준시에 합격하여 자품을 정2품 자헌대부에 올려준다.
세조 14년에 자품을 건너 뛰어 종1품 숭정대부에 가자되고 행지 중추부사에 임명 한후에 다시 숭정대부판 중추부사에 임명한다.
그 후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사에 오른다.
그 후 성종2년(1477년)에 경연에서 임금이 경전의 어려운 부분을 물었을때 구종직은 "임금은 날 때 부터 아시는 분이라, 격물치지 (格物致知)의 공부를 반드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가 대간(사헌부 사간원)에서 들고 일어나 성종은 부득이 경연의 직에서 물러 나게 하였다.
그 후 구종직은 칠십에 정2품이상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신하들이 가는 기로소에 들어 갔다 성종8년 정유년 1477년에 돌아가니 구종직의 나이 칠십사세라 벼슬이 일품에 오르고 문장이 으뜸이고 특히 경학과 역학 (주역)이 당대에 으뜸이라 시호를. 안장( 安長)이라 하였으니 화평하고 즐거워 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아니하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남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장長이라 한다.
구종직은 성현의 용재총화에 "용모가 기위하고 자태가 뛰어나 세조에 발탁되어 그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