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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종직의 죽음을 애도하는척고시( 斥苦詩ㅡ晩詞)

인천 갈매기 2026. 5. 1. 15:46

구종직의 죽음을
애도하는척고시(  斥苦詩ㅡ晩詞)를 지어 올린이들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서거정(徐居正)은 구종직과 같이 세종26년 갑자시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조 예조 판서 양관 대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오르다.

양촌 권근의 외손자이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조까지  
여섯 임금을 모신 것이 구종직과 같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문선 동인시화 등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서거정이 구종직의 죽음을 애도하는 척고시를 적어 본다

"공의 체구는칠척으로 오동나무와 같이
쭉 뻗어 잘 생기고 이척 二尺의 잘생긴 수염을 기르셨으며 인품이 총명하시고 말씀이 화락 和樂하시고 정주程朱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벼슬이 일품에 오르시고 삼조 三朝세종 세조 성종을 모셔 인신으로 귀함이 더 할 나위 없고
수壽가 팔십을 바라보니 오복 五福을 갖추었으며 그 자손들이 흡사 구슬 보배와 같이 보이더라"고 하였다.

구종직의 문인  풍천인 서하군 임원준 (좌찬성을 지냄)은 다음과 같이 척고시 를 지어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쌓고 이름을  날리니 모든 선비들이  알아주는 유학의 대학자가 되었더라 성군을 만나 벼슬이 높아지고 용모가 잘 생겨 으뜸이고 수염이 길어 대인의 풍모라 숙연하고 생각이 깊은 것이 군자의 겸손함이라 언변이 부드럽고 화락함을 갖추니 일정한 경지를 넘은 달인에 통함이라 사람을 가르침이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니 학문에 공이 크도다.

자손(아들)을 연이어 두었으니
가풍을 이어가고 나이 칠십을 넘어 명대로 살고 펀안히 돌아가시네
장부의 한이 어찌 공에게만 있으리오마는 오직 기이의 향유가 빠지고 의정(議政ㅡ 삼정승  )을 못하셨으니 이 또한 애석해
하는 바이니라" 척고시를 쓴 인사를 보면 구종직과 같은 반열의 인사로는
서거정 강희맹이며 구종직의  문인으로 풍천인 서하군 좌찬성 임원준 문인 양성인 예조판서 이승소 문인 양천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최숙정 남양인 성균관사를 지낸 홍경손 등이 구종직을 애도하는 척고시를 지어 올렸다.

척고시를 지어 올린분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구종직 이 평소에 권문 세가들의 인사들과 멀리하고 권력에 연연戀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 종직은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뜰때  자손들을 훈계하는  글을 남긴다.

그 내용을 아래에 적어본다.

임종 계 아 자손 臨終 戒 我 子孫
憶 昔 叨陪 慶會樓 受恩 感激任諮諏 深懷 一部春秋 義 仰 載 三朝 日月 猶 堯舜 治平 承 傳語 程朱 道學 講明 修 愛親 憂國 當然 職  戒 我 子孫 自己  求

억석 도배 경회루 수은 감격 임자 추 심회 일부 춘추 의 앙 재 삼조 일월 유 요순 치평 승 전어 정주 도학 강명 수 애친 우국 당연 직 계 아 자손 자기 구
"옛적에 외람되게도 경회루에서 상감( 세종 )을 모신 일을 생각해 보니 감격스럽게도 상감 세종께서 여러 가지로 (신에게) 하문 하여 주셨지!
마음 깊숙히 일부의 춘추의 의리를 품고서( 구종직이 임금 앞에서 춘추 한질을 암송한 것을 이름 )
우러러 삼조( 세종 세조 성종 )의 임금을 받들어 모셨노라.

요 순의 태평성대를 이루는 말씀을 이어 받고 정자와 주자( 중국 송나라의 정호 정이와 주희 )의 도덕 학문을 닦아 배워 가도록 하여라.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충성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니 나의 자손들아!

스스로 자기 몸을  갈고 닦을 지어다"

이 글은 구종직이 자기 자손에게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님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학문에전념하라는 뜻으로 자손들을 훈계하고 자기 직분을 알고 세상을 살아 가도록  가르친 글이다.

당시의 사회 풍조

구종직이 벼슬할때의 사회는 사치 풍조가 만연되었으나 구종직은 청렴 결백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구종직이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세종 임금이 나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튼튼히  하였고 문종조의 짧은 재위와 단종조 때 혼란한 시기를 지나서
세조 예조 성종조때에는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의 문물이 풍부하고 외교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적의 침입이 없어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태평성대한 시대였다.

시대가 이러하니
자연히 백성들과 벼슬아치들 사이에는 사치풍조와 재물을 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벼슬하는 양반과 잘사는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고 살고 있는 집을 사치스럽게 단장하는 풍습이 널리 만연 되었다.

당시에  높은지위에서 재물을 탐한  벼슬한 사대부와 구종직을 비롯한 청렴한 인사들의 이야기를 알아본다.

조선조에 명재상으로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도 그 아들들은 재산을 탐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황수신은 황희 정승의 셋째 아들로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세조즉위에 공이 커 도승지에 오르고 후에 영의정까지  오른다.
충청도 아산에 남의 땅을 무단히 점거하여 여러번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의 비호를 받아 벼슬 자리에 있게 된다.

황희 정승의 또 다른 아들 황치신도 아버지 덕에 음사로 벼슬길에 올라
충청도 병마절도사와 판 중추부사에 오른다 그러나 남의 노비를 빼았다가 파직을 당했으나 후에 세조의 비호아래
관직에 복직된다.

야사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황희정승의 아들이 호화로운 집을 짓고 고관 대작들을 불러 집들이를  할때 그의 부친 황희정승도 초대되었다  황희 정승은 아들의 호화로운 집을 보고 노발대발하여 당장에 아들집에서 나와
초대되었던 손님들이 멋적어 흗어져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이야기 조선왕조 오백년사)

그 후 성종대에 이르러 언관들의 탄핵 활동이 활발해져 아무리 높은지위의 관료라도 언관들의 탄핵 대상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당시 사헌부 장령 (정4품 )으로 있던 김제신金悌臣이가 전조인 세조때 부터  총애를 받아 왔던 양성지가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김제신은  "양성지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많은 재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궁중에 파다하다 하며 이런자를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한다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는다면서 끝까지 반대한다.

그러면서 그 진원지는  밝힐 수 없다" 고
하였다  이에 성종임금은 조사결과 발견할 수 없다고 무마하려고 하였지만 김제신의 상소로 양성지는 대사헌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양성지는
훈구파의 주류로 많은 편찬사업에
관여한  세조 예종 성종조의 명신으로
전해 오지만 재물을 탐했다는   것은 언관 김제신의 상소에서 비롯되어 하나의 양성지를 비웃는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세조때 구종직이 공조판서로 있을 때 대사헌 양성지는 구종직 의견을 매사에 반대하여  의견충돌이 있어 세조가 중재한 이야기가 실록에 전해 온다.
훈구파 신숙주 편에 선양성지는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있는 구종직과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 하였다.

그밖에도 홍윤성은 계유정난때  호랑이 대감으로 알려진 좌의정 김종서를 제거한 무장으로 세조 즉위 후 공신에 오르고 영의정 까지 한다.

그러나  성격이 난폭하고 재물을 탐하였다는  이야기 전해 온다.

하루는 숙부가 아들의 취직을 부탁하자 논 이십두락을 요구하였다  이에 숙부는 노하여 조카인 홍윤성과 언쟁을 벌렸다  홍윤성은 숙부를 죽여 후원에 암매장 하였다.

숙모는 세조 임금이 행차하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이 억울하고 반인륜적이 사건을 임금에 알렸으나 처음에는 세조
가 노하였으나 공신이라는이유로 홍윤성은  벌하지 않고 그 노비만 목을 베어 처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청렴한 신하의 표본ㅡ구종직

이에 비하여
구종직은 조정에서  청렴결백한 신하의 표본이었다.